티스토리 뷰

쓸데없이 전투심으로 요동쳤던 심장과는 대조되게 처음 도착한 이타카는 아직 늦여름의 따스한 햇살로 가득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는 여학생 전용 기숙사인 날개 모양의 발치 홀(Balch Hall)의 아치게이트를 지나 보이는 북 캠퍼스엔 신입생들의 기숙사가 몰려 있었다. 내 모교인 청심국제고 캠퍼스보다 수 백 배는 크고 각종 운동 시설과 편의 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어 이 근처에서만 하루 종일 생활해도 그리 지루하진 않을 것 같았다. 심지어 천문대와 골프장, 야구장, 두 개의 잔디 축구장, 그리고 테니스장까지 북 캠퍼스에 있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날씨 또한 따뜻하고 예상 외로 꽤 건조하여 매우 상쾌했다. 겨울만 되면 섭씨 영하 20도 이하로 밥 먹듯이 떨어지는 뉴욕 북동부의 살인적인 날씨를 만날 수 있을거라 호언장담하던 당시 기숙사 사감인 3학년 벤자민(Benjamin)이 그때는 내겐 완벽한 거짓말쟁이로 보일 정도였으니.

 

나는 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학생들을 위한 3일간의 적응 프로그램인 프리페어(PREPARE)에 참가했기에, 남들보다 일찍 캠퍼스에 도착했다. 예상 외로, 한국계 친구들의 참가율이 상당히 좋아서 10명 가량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들과는 캠퍼스 탐방과 생필품 및 음식 구입, 은행 계좌 신청, 핸드폰 가입 등을 같이 하게 되었다. 사진에서만 보던 건물들을 친구들과 교정을 거니며 보게 되니 무척 색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로웠고 나를 고양시켰다. 내가 아이비리그에 합격하리라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이곳에서 3,000명의 합격생 중 하나가 되어, 150년을 훌쩍 넘는 역사 동안 쟁쟁한 선배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캠퍼스를 산책하고 있다니!

 

프리페어 두 번째 날 친구들과 나는 풋볼을 던지고 놀기 위해 신입생 기숙사 지역인 북 캠퍼스에서 처음으로 벗어나 올드 캠퍼스(Old Campus)라는 별칭을 가진 문리과대학 쿼드(Quadrangle: 대학교 건물들 사이에 위치한 정원)로 향했다. 싱그러운 초록빛의 융단처럼 펼쳐진 거대한 잔디밭은 약 150여 년 전 목초지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았다. 그 잔디밭 곧곧에 놓인 거대한 상록수들 아래는 다른 신입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독서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들과 달리 코넬은 2개의 사람 동상이 있는데, 하나는 대학의 설립자 에즈라 코넬(Ezra Cornell)의 좌상이고 또 하나는 초대 총장인 앤드류 화이트(Andrew White)의 전신상이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이 동상들의 발을 문지르곤 하였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던 그런 풍경처럼 말이다. 물론, 미국 동부 대학들에는 동상의 구두를 만지면 그 대학에 합격한다는 미신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아이비리그에서 가장 큰 야드(Yard: 건물 없이 탁 트인 들판)중 하나인 이 A&S 쿼드는 수 백년의 역사를 지닌 오랜 건축물들과 현대적으로 지어진 거대한 도서관인 올린(Olin)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웅장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올린 도서관 반대쪽에는 대학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자 판타지소설 <해리 포터>의 호그와트를 연상시키는 인테리어로 유명한 유리스(Uris)도서관이 있었고, 그 옆에는 대학의 공식적 상징물인 맥그로우 타워(McGraw Tower)가 있었다. 이 시계탑 위에는 자명종을 연주하는 피아노와 비슷한 악기 카임스(Chimes)가 있었고, 타워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중앙 캠퍼스(Central Campus)와 비비 호수(Bebee Lake)는 내가 방문해본 국내외 20여개 대학들 중 최고의 장관이었다.

 

우리는 실컷 풋볼을 던지고 논 후, 오른쪽 어깨가 아려올 무렵 격렬하게 뛰는 심장 박동을 진정도 시킬 겸, 못다한 캠퍼스 탐방도 할 겸 문리과대학 쿼드에서 최대한 남쪽으로 걸어가 보기로 하였다. 교정의 남쪽에는 고학년들이 사는 아파트들과 오래된 레스토랑들이 많이 위치한 대학 타운(College Town)이 있다는 사실을 귀동냥으로 이미 확보해 놓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서관을 제외하고 문리과 쿼드에서 가장 큰 수업 건물인 골드윈 스미스 홀(Goldwin Smith Hall)에 다다를 때 즈음 우리는 벌써 땀이 식어 걸음걸이가 더욱 가뿐해 졌다.

 

그리고 나서 큰 도로인 스태틀러 드라이브(Statler Drive)로 나서니 마치 어느 자동차의 외관을 연상케 하는 무광택의 검정색 빌딩인 유리스(Uris) 홀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옆에는 노사관계학과(Industrial and Labor Relations)의 본관인 아이브스(Ives)홀이 있었다. 채 반 세기가 되지 않은 건물은 짧은 역사에도 중세 유럽풍의 분위기를 내는 쿼드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 동아리들의 바비큐 파티장인 탓에 훗날 자주 다니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지만. 물론, 아이브스 홀이 멋진 건물이긴 하지만, 코넬에서 맥그로우 타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랜드마크는 바로 스태틀러(Statler) 호텔이다. 카유가(Cayuga) 호수를 둘러싼 어느 동화와 같은 풍경을 굽어보는 9층짜리 건물은 153객실을 품에 앉은 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타이탄(Titan)처럼 코넬의 서 캠퍼스를 내려 보고 있었다. 내가 ‘복지병’ 군사특기로 육군 복무를 마친 국군복지단 서귀포 호텔이 7층에 64객실임을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호텔학교의 본관인 스태틀러 홀(Statler Hall)은 스태틀러 호텔(Statler Hotel)의 바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뉴잉글랜드 건축양식의 고풍스러운 올드 캠퍼스의 건물들과는 달리, 스태틀러 홀은 호텔의 외벽과 같은 밝은 벽돌과 투명 유리로 마감되어 20세기 초반의 감성과 21세기의 세련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마치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의 헌츠만 홀과 비슷한 감성을 가진 건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스태틀러 홀 앞에는 MIT의 슬로언(Sloan), 유펜의 와튼(Wharton), 버클리의 하스(Haas)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영학 학부과정을 제공하는 다이슨(Charles Henry Dyson) 응용경제대학과 소수정예로 유명한 존슨(Samuel Curtis Johnson) 경영대학원이 있다.

 

이 두 학교는 모두 세이지(Sage)홀을 본관으로 사용한다. 언뜻 보면 그렇게 크지 않아 보이지만, 세이지 홀 내부에는 타이타닉 호의 연회장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아트리움이 있어 비즈니스 스쿨 학생들, 특히 MBA 학생들의 사교 장소로 자주 사용된다. 또한, 각기각색의 회사에서 리쿠르팅을 온 헤드헌터들이 모여 학생들에게 홍보하는 채용 박람회의 장소로 애용되어 고학년이 되었을 때 나도 대학원생들 사이에 몰래 끼어 들어가곤 하였다.

 

스태틀러 홀 옆에는 거대한 공대 건물들이 줄지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중간에 떡 하니 서 있는 더필드 홀(Duffield Hall) MIT에서 건물을 하나 수입해 온 듯한 미래지향적 디자인을 띄고 있었다. 건물이 워낙 크고 긴 탓에 눈이 좋지 않다면 호텔 쪽 입구에서 반대편 출구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공대 쿼드의 중추역할을 하는 건물답게 공대에서 가장 학과전공 면에서 인기가 높은 산업공학 수업들이 포진되어있는 로즈 홀(Rhodes Hall)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토목공학과 환경공학을 수용하는 홀리스터 홀(Hollister Hall), 그리고 기계공학, 우주공학, 생의학공학 등을 담당하는 킴볼 홀(Kimball Hall), 써스톤 홀(Thurston Hall), 그리고 바드 홀(Bard Hall) 바로 옆에 인접해 있다.

 

이 쿼드는 여러 젊음이들의 밤잠을 불태우게 하는, 사시사철 아침저녁으로 개방되어있는 공대 도서관인 카펜터(Carpenter) 도서관을 포함해 직사각형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쿼드가 대학 타운으로 가는 지름길인 탓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서 그런지 캠퍼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청설모들이 이 공대 쿼드에서 만큼은 볼 수가 없다.

 

“우리 너무 멀리 온 것 아니야? 로스쿨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 있으니까 우리 이제 돌아가서 저녁 식사를 하도록 하자.

 

한 친구가 꽤 그럴 듯한 제안을 했고, 거대한 캠퍼스를 거닐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마지막으로 로스쿨 캠퍼스만 방문하고 북 캠퍼스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코넬의 대학원 중 맨하튼 시내의 한복판에 있는 웨일(Weill) 의학대학원과 더불어 가장 명망있는 학교인 탓일까? 로스쿨 쿼드는 가장 고풍스럽다고 느꼈던 문리과 쿼드와도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문리과 쿼드의 건물들은 각기 다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마치 해안가의 형형색색의 조약돌을 보는 느낌이었다면 로스쿨 쿼드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릿지 대학처럼 중후한 색을 지닌 하나의 벽돌로 지어져 격식 있으면서 학구적인 분위기를 물씬 띄었다.

 

공대 쿼드에서 내려다보이는 로스쿨의 중추적 건물인 마이런 테일러 홀(Myron Taylor Hall)은 전망대와 기숙사, 식당, 도서관을 모두 보유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햇빛을 한 번도 보지 않고도 학사일정을 마칠 수 있을 수 었어 보였다. 법학 대학원 맞은 편의 버스 정류장에서 북녘행 버스를 기다리게 되기까지 약 30분 간의 보행동안, 친구들이 하나같이 뉴욕시 동북부의 가슴이 멎을 듯한 풍경과 고풍스러운 건물들에 넋를 잃고 있을 때, 촌스럽게도 나는 가족들과 화목한 분위기에서 교정을 걷고 있는 다른 외국인 학생들에게 혼이 팔려 있었다.

 

“저기 수트에 넥타이까지 매고 걷고 있는 청년들은 뉴저지 주 알파인(Alpine)에서 온 귀족 집안의 자제들일까? 저기 매력적으로 그을린 피부에, 프레피한 원피스를 입고, 단아한 샌들에 프라프치노를 즐기고 있는 소녀들은 베벌리 힐스 인근의 전통 있는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했을까?

 

이윽고 버스가 왔고, 우리는 이미 받은 학생증을 기사석 옆의 단말기에 대고 좌석에 탑승했다. 신입생일때는 1년에 20만원을 호가하는 연간 이용권이 무료로 제공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버스 뒷 편에 엉덩이들을 던져 넣은 우리는 지쳐 대화보다는 너나 할 것 없이 밖을 보았다. 나는 운이 좋게도 맨 왼쪽, 즉 공대 쪽이 아닌 로스쿨 쪽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아까 걸을때 로스쿨에 정신이 팔려 미쳐 감지하지 못한 한 건물을 발견했다. 바로 애나벨 테일러 홀(Annabel Taylor Hall)로써 한인교회를 포함하고 있는 예배당이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데도 성가대의 은은한 아카펠라 소리가 울려퍼져 마음이 차분해졌다. 고등학교의 재단이 통일교여서 다른 특목고와는 달리 우리는 1주일에 한 번 종교학개론 수업이 있었다. 에나벨 테일러 홀을 보자 마자 그 수업이 무척 재미 없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하지만 예배당에서 고혹적인 주홍 불빛과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적은 실로 처음이었기에 마음이 편안해 졌다. 나보다 우월한 고등학교 동기들, 그리고 다른 특목고 국제계열의 수재들과 아이비리그행 티켓을 놓고 피 튀기는 경쟁을 했던 시절을 돌이키니 대학에서 만큼은 유년기에 침례교회를 다니며 정서적 안정을 찾았던 것처럼 신앙 공동체에 다시 빠져드는 것도 좋아보였다.

 

그렇게 아련한 기억 저 너머의 치열했던 과거를 하나하나 되짚는 것조차 사치였을까? 이제 다음 주면 코넬대학교에서 첫 수업이 시작된다 생각하니 문득 벌써부터 긴장감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수원외국어고등학교 영어과에서 한달을 보내고, 청심국제고의 유학반 1학년 4반에 편입한 직후와 맞먹는 불안감이 내 심장 박동을 가쁘게 하여 꽤나 빠른 불협화음을 연주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은 마치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의 화자가 마주한 상황처럼 두 갈래였다. 아이비리그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에 짓눌려 내 성적과 상관없이 성공으로 이끌리란 오만에 취하느냐, 아니면 소년이 아닌 남자로써 내 이력서에 당당한 인재가 될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선택의 기로가 주는 부담감 한 편에는 세계 1위의 호텔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흥분감 또한 있었다. 가시덤불이 주는 고통을 참아내고 장미꽃을 따왔던 내 의지는 미련했다. 그러나 피흘릴 각오를 한 채 나는 다시 수재들의 전쟁터로 향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